[가톨릭신문] 이순이 루갈다의 십자가와 옥중편지

치명자산성지 | 2018.10.27 10:35 | 조회 56

[박물관 문화 순례] 호남교회사연구소 문서고 2


완덕 위해 동정생활 했던 ‘루갈다 남매’ 사연 절절

발행일2015-11-01 [제2967호, 13면]

 ▲ 유중철, 이순이 부부가 끝까지 동정서약을 지키는 힘의 원천이었던 십자가와 이순이의 옥중편지. 이 옥중편지에는 지극한 효성과 형제간의 뜨거운 우애, 깊은 신앙이 절절하게 표현돼 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복음의 권고에 따라 완덕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삶이다. 신앙선조들, 특히 순교자들은 완덕으로 나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 완덕을 이루기 위해 신앙선조들이 일찍부터 동경하던 생활이 있었으니 바로 동정생활이었다. 많은 이들이 동정생활을 선택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모범이 되는 분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동정부부 순교자 복자 유중철(요한)과 복녀 이순이(루갈다)일 것이다.

호남교회사연구소에는 유중철·이순이 부부와 관련된 소중한 유물들이 보존돼 있다.

이순이는 1782년 한양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로부터 신앙을 이어받았다. 1793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1795년에는 주문모 신부로부터 첫 영성체를 했는데, 이순이는 첫 영성체를 위해 나흘 동안이나 집 안에 들어앉아 영성체를 위해 준비했다고 한다. 첫 영성체 이후 이순이는 오로지 덕행을 쌓는 데만 마음을 쏟았다. 그리고 천상배필을 위해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15세가 되던 1797년 어느 날, 이순이는 어머니에게 동정을 지키기로 다짐해 왔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어머니는 이 말을 듣고 매우 놀랐지만 딸의 선택을 허락해 주었고, 주문모 신부와 이 문제에 대해 의논했다. 그때 주문모 신부의 기억에 동정생활을 결심한 바 있던 전주의 유중철이 떠올랐다. 1795년 5월, 전라도 전주에 사는 양반으로서 대부호이며 가성직제도 시절 전라도 선교 책임자였던 복자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집을 방문했을 때, 유항검의 큰아들 유중철이 아버지와 주문모 신부에게 동정생활에 대한 결심을 고백했던 것이다. 이에 주문모 신부는 하느님의 섭리라고 느껴 즉시 사람을 보내 둘의 혼인을 주선했다.

1798년 9월 이순이는 남편의 고향 전주 초남리로 가서 남편과 함께 시부모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동정서원을 깨뜨릴 뻔한 유혹도 십여 차례 겪게 되는데, 1800년 12월에는 그 유혹이 너무 심해 모든 것이 끝장나는 듯한 고통을 겪었지만 예수님의 성혈공로(聖血功勞)에 힘입어 이겨낼 수 있었다. 호남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된 이순이의 십자가는 동정부부 서약을 끝까지 지킬 수 있도록 도운 힘의 원천이었다.

1800년 12월, 두 사람은 예수님이 겪으신 광야의 유혹에 부딪혔다. 본능 속에서 잠자던 음욕의 거센 불길이 미친 듯 일어나곤 했던 것이다. 그때마다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가슴은 창에 찔려 열린 채 매달리신 예수님의 크신 은혜, 크신 사랑, 크신 아픔을 우러러보며, 주님을 저 지경에 이르게 한 죄를 뼈가 아프도록 통회하는 눈물을 흘리면서 유혹의 불길을 끌 수 있게 힘을 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이 두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이순이가 평생 지니고 있던 십자가는 그 몸체가 다 닳아 문드러져 있다.

순교 신심과도 연결되는 이순이의 십자가는 1914년 초남리 근처 바우배기에 모셔져 있던 유항검 일가족 묘를 정리해 치명자산으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작업하던 인부 중 한 사람이 자신의 주머니에 넣어 몰래 가져가 버리는 바람에 꽁꽁 숨겨졌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그 인부의 가족들이 이 십자가는 자기들 집에 모실 것이 아니라 생각해 호남교회사연구소 초대 소장 김진소 신부에게 기증하면서 교회공동체의 유산으로 소중히 모셔지게 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1801년 신유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 돼 이순이가 살던 초남리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이때 시아버지 유항검이 가장 먼저 체포돼 한양으로 압송돼 갔다. 이어 그녀의 남편 유중철도 체포되면서 전주로 잡혀갔다. 이후 연좌형에 의해 이순이와 나머지 가족들도 그 해 9월 중순 경에 전주로 끌려갔다. 전주로 끌려간 이순이와 가족들의 옥중 생활은 두려움·걱정·고통도 있었지만 순교에 대한 열망이 더 컸기에 모든 잡념이 사라지는 희망의 시간이었다. 이러한 내용이 「루갈다 남매 옥중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옥중편지는 현재도 보존상태가 뛰어나 순교자들의 옥중 생활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중요 유물로 평가된다.

이순이는 옥중에서 옥리들의 눈을 피해가며 완덕으로의 삶의 여정을 정리했다. 주문모 신부는 이순이에게 박해를 당하거든 그 상황을 소상히 기록해 두도록 일러뒀다. 그리하여 이순이는 박해의 자초지종을 적어 시동생 유문석 편에 친정으로 보냈다. 또 친정 어머니에게 유서인 옥중편지를 보냈다. 이순이는 가족들에게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말은 참되다”며 간곡한 유언을 남겼다. 참으로 이 옥중편지 안에는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과 형제간의 뜨거운 우애, 그리고 깊은 신앙이 절절하고 진솔하게 담겨 있다. 이 옥중편지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순교자들이 쓴 최초의 옥중편지이기도 하다.

1858년 다블뤼 주교는 「한국 주요 순교자 약전」을 쓰고, 1859년부터는 약전에 대한 「보유편」을 작성하던 중 이순이 삼남매의 옥중편지를 발견해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보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은 어느 곳에도 원본이 남아 있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1868년 울산 장대에서 순교한 김종륜의 필사본이 유일하게 남아 호남교회사연구소에 소장돼 있다. 이 필사본은 김종륜의 손자인 김병옥이 소중하게 보관해 오다가 교회사가인 지원 김구정 선생께 기증한 것인데, 후에 다시 호남교회사연구소에 전해졌다.

한국천주교회 순교역사 안에서 동정부부 순교자 유중철과 이순이 두 분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삶의 표본으로 남겨준 은총이며, 이순이가 몸에 지녔던 십자가와 옥중편지는 그 은총을 증언하고 있다.

※문의 010-6689-2070 호남교회사연구소장 이영춘 신부

 ▲ 동정서약을 지킨 복자 유중철(요한, 왼쪽)과 복녀 이순이(루갈다)의 유해를 모셨던 사발.

이영춘 신부(호남교회사연구소장)
사진 호남교회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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