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1년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 때부터 1801년 유항검 일가가 순교의 길을 걸을 때까지 전라도는 매우 평온하여 복음전파가 놀라울 만큼 번창하였다.
그리하여 고산, 진산, 영광, 용담 등에 천주교가 전파되었다.

복음이 이렇게 빨리 전파되는 데 가장 많이 이바지한 사람은 유항검이었다.



박해의 회오리는 엉뚱한 곳에서 불고 있었다.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임금 정조가 승하하고, 나이 어린 순조가 등극하자 수렴청정에 나선 정순왕후와 그의 추종세력들은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할 목적으로 천주교 박해령을 선포하고 전국의 천주교도를 수색하여 체포하도록 했다.
이로 말미암아 초기 교회의 지도급 인사인 이승훈과 정약종, 이존창, 강완숙, 최필공, 최창현 등이 차례로 잡혀 순교의 길을 가게 되었고,
주문모 신부는 한 대 피신하였으나 스스로 출두하여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되었다.
또한 왕족인 송씨와 신씨도 순교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여파로 황사영의 ‘백서(帛書)’가 드러나고 황사영 역시 순교의 길을 가게 된다.

  • 유항검과
    동료들의 체포

  • 이러한 회오리 바람은 전라도를 비켜가지 않았다.
    1801년 봄 삼월 초남리에는 때아닌 포졸들의 무리가 들이닥쳤다. 그리고 사학괴수 유항검과 그의 동료들이 차례로 붙잡혀 갔다.
    유항검이 체포되면서 포졸들에게 그의 집 신주독이 비어 있는 사실이 발각되었다. 3월 28일부터 신문이 시작되었다.
    신문은 20여 일 간 계속되었는데, 유관검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윤지헌, 이우집 등 7,8명의 신도 이름과 그 동안 있었던 교회 사정을 모두 불어 버리고
    말았다. 전주감영의 포졸들은 윤지헌, 이우집, 김유산, 한정흠, 최여겸 등과 유항검의 노속(奴屬), 소작인들, 그리고 전주, 김제, 금구, 고산, 무장, 흥덕,
    영광, 함평, 무안 등지에서 200명 이상의 신도들을 체포하여 왔다.
    신문이 진행되면서 엄청난 사건이 드러났다.
    즉, 대박청래(大舶請來)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 것이다. 사건의 심각성이 드러나자 전라감사는 서울에 사건의 진상을 알리고 김유산을 체포했다.
    정부에서는 이들을 서울로 압송하도록 했다. 전라감사는 5월 16일 이들을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하고 배교한 자들 137명은 귀양 보내거나 석방하였다.
    그러나 한정흠, 최여겸, 유항검의 종 김천애 등은 대박과는 관련이 없었지만 신앙을 굽히지 않자 서울로 압송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사람들은 형조에서 심문을 받았다. 형조에서는 7월 13일 한정흠, 최여겸, 김천애에게만 먼저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리고 판결에 따라 전주감영으로 보내어 처형토록 했다.
    형조에는 아직 처리되지 않은 유항검ㆍ관검 형제, 윤지헌, 이우집, 김유산이 남아 있었다.
  • 동료들의
    순교

  • 서울 형조에서 아직 유항검 등의 사건이 진행되고 있을 때, 한정흠, 최여겸, 김천애 등 세 사람은 전주로 왔다가 다시 각각 자기 고향으로 압송되었다.
    이들에 대해 전라감사는 그의 장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도내 사학죄인 한정흠, 최여겸, 항검의 노(奴) 천규(千愛의 오기)는 죽는 것을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생각하여 조금도 마음을 바꿀 줄을 모르며,
    작정하여 널리 교(敎)를 펴고 서로 돌아가며 깊이 빠졌으니 모두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모두 한가지 법률로써 시행하여 결안을 받들어 정법(正法,
    즉 사형에 처함)하였습니다.”
  • 유항검에 대한
    판결과 순교

  • 드디어 9월 11일, 유항검 등에 대한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유항검에 대한 의정부의 최종판결은 이러하였다.
    “그는 윤지충의 지친으로 사학(천주교)에 고혹되어 주문모 같은 외국 사람을 신부로 삼았으며, 신주를 묻고 제사를 폐하니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
    이가환, 이승훈, 권일신, 홍낙민 무리와 같이 주문모와 한 통속이 되어 몰래 외국과 내통하였다. ‘이가환은 은전 50량을 내고, 유항검은 당질(조카)
    유중태와 함께 400량을 판출’하여 김유산을 서양인 있는 곳으로 보내어 큰 배를 청해 와서 우리나라를 위협하여 한바탕 결판을 낼 계교를 꾸몄다.”
    5인 모두에게 그들의 출신도인 전주로 압송하여 백성들 앞에서 처형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전라감사는 의금부의 지시에 따라 9월 17일(양력 10월 24일) 전주 남문 밖에서 사형을 실시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항검은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로 머리를 자르고 4지를 잘라 여섯 토막을 내는
    능지처참형을 받았다. 그리고 이우집과 김유산은 정상을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은 죄(知情不告罪)로 참수되었다.
    그리고 능지처참형을 당한 유항검의 목을 남문 누각에 달아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는 본보기로 삼았다. 이 때 유항검의 나이는 46세였고, 그의 아우
    관검은 34세였다. 유항검의 집은 파가저택(破家瀦澤)되었고,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에게는 노적(孥籍, 노비의 적에 둠)의 법을 시행토록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죄인들을 배출한 전주의 등급을 강등시켰다. 당시의 형법(刑法)에 의하면, 대역부도죄인이나 모반 대역죄인은 능지처참하고 그 가족은
    연좌형(緣坐刑)으로 처형되었다. 연좌형이 내려진 근본 이유는 유교적 윤리관을 기반으로 한 혈연적 유대를 강조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16세 이상의 아들은 교수형에 처하고, 15세 이하의 자녀와 처는 노비로 삼고, 시집을 갈 약속을 해둔 여자는 그의 부(夫)에게 보냈으며, 전 가속은
    분산하여 정배시키는데 3천리 밖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리고 가산은 관에서 몰수하였다. 그리고 유항검의 노비들 중에서도 유배된 이가 많았다.
    이제 천주교는 무부무군(無父無君), 멸륜난상(滅倫亂常)의 오랑캐나 금수의 종교의 아니라 국가 전복음모 단체로 탄압받게 되었다. 사교를 믿은 것만이
    아니라 외국과 내통하고 서양의 큰 배를 끌어들여 정부를 위협하는 반국가 역적의 무리로 취급되었다.
    그러한 인식은 ‘황사영의 백서(帛書)’사건에서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 치명성인
    유항검

  • 유항검과 그의 동료들이 처형된 죄목은 역적모의라는 국가전복음모죄와 거기에 연루된 죄였다.
    따라서 이들은 신앙과는 관계없이 마땅히 처형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순교 여부는 가려져야 한다.
    왜냐면 유항검이 대역부도죄로 사형당한 후 전라도 신도들이 그를 ‘치명성인’으로 공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는
    그를 배교자로 인식하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배교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관검은 분명히 배교하였다. 그는 대박청래의 진상을 소상히 밝혔고, 천주교에 관련된 사람들의 명단을 공개하여 사건을 확대시켰다.
    윤지헌은 폐제를 지켰다. 그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성서와 성물을 신고하고 경향각지에 있는 신도들의 명단을 밝히라”는 관장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대박청래에 대한 진술은 이미 유관검에 의하여 발설된 것을 대질신문할 때 밝힌 정도였다.
    어느 기록에도 그가 뚜렷하게 배교했다는 흔적은 볼 수 없다.
    유항검이 전주감영에 체포된 것은 사학의 괴수 즉 천주교도의 우두머리라는 죄목이었다.
    그의 신앙생활에 대해 유관검이 법정에서 말한 바에 의하면, 그가 신주를 폐기하여 인륜을 끊고 조상의 은혜를 끊어버린 것 같아서 동생의 입장에서
    보기에도 망극하므로 충고했지만 변하기는커녕 점점 더했다고 한다.
    유항검은 천주교도들의 이름을 밝히라는 전라감사의 추달에도 “주리를 틀어 죽을지언정 친한 사람이 없다”면서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대박청래 사건을 자백한 것은 이미 유관검이 진상을 실토했던 것을 심문관들이 확인하려는 일이었으므로 진술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문초 과정에 기록된 문서에는 어느 곳에도 배교의 표현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달레는 “불행히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마음 약하게 배교하였던 것 같다”고 말하면서 “맨 처음에는 다른 세 사람과 마찬가지로 배교하는 표를
    보여 주는 나약함을 가졌다는 말을 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이 무익하지 않아, 마지막 순간에 자기들의 피로 자기들의 죄를 씨는 은총을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고 했다. 죄의 최종심판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다.
    그러나 순교와 배교의 사실 여부를 가리는 데는 동정이나 추정으로 판별되는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근거되어야 한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 1857년부터 한국 천주교회사와 순교자저의 편찬 책임을 교구장으로부터 위촉받은 다블뤼 주교가 1862년까지의 사료를
    수집하여 작성한 - 『순교자 비망기(殉敎者 備忘記)』를 가지고 편찬한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을 판별하는데 다블뤼 주교의 『순교자 비망기』가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보다 더 중요하고 확실하다 할 수 있다. 순교자 비망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다른 세 사람과 같이 배교했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부인하므로, 그는 하느님 앞에서 순교자들의 빨마 가지를 기대하고 있다.”
    조선 신도들은 유항검을 순교한 것으로 말한다.
    조선 신도들은 신유박해 후 폐허가 된 조선교회의 재건을 위해 1811년 10월 24일(양력 12월 9일) 교황에게 탄원서를 띄웠고, 북경 주교에게는
    11월 30일 (양력 12월 18일)에 보냈다. 이 탄원서에는 1801년에 순교한 주문모, 강완숙, 윤점혜, 이순이, 최필공, 정약종, 황사영에 대한 간단한
    전기를 쓰고, 45명의 순교자 명단이 나오는데 그 안에 유항검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라도 신앙공동체가 유항검을 순교자로 믿고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09년 전라도 신도들이 뮈텔 주교에게 보내는 서한문의 서두에는 “치명성인 유항검”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그의 순교를 인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