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1년 신해박해는
신앙을 보존하고 수계생활을 계속하려는 신도들에게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게 했으며, 신도들은 낯선 고장의 깊은 산중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믿음에 대한 천주의 시련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초기 교회 지도자들(양반계급에 속하는 이들)이 조상제사 문제 등을 이유로 교회를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천주를 흠숭하며 믿음에 대한 철저한 신심생활을 고집하는 이들은 더욱 굳은 믿음생활에 정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지도자들은 교회 초기부터 제기되어온 선교사 영입운동을 더욱 구체화시켰다.

  •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초남리 방문

  • 조선교회는 정부의 감시가 삼엄하여 중국으로 밀사를 파견하지 못하다가 1793년에서야 지황(사바)과 박 요한을 파견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이들과 선교사를 파견하는 문제를 다시 상의하고 파견을 약속했다. 구베아 주교는 주문모(周文模, 야고보) 신부를 선발했다.
    그는 신심이 깊고 신학과 중국 문학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고, 외모도 조선인과 비슷해서 어느 한군데 모자란 데 없는 적임자였다.
    1794년 12월 23일 주 신부는 지황(사바) 등을 만나 한복으로 변복하고 의주 변문(중국과 조선을 오가는 관문)으로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12일 만(1795년 1월초)에 무사히 서울에 도착하여 미리 마련된 계동(桂冬)의 최인길(催仁吉)집에 거처를 정했다.
    주 신부가 입국하였을 때, 조선교회의 신도 수는 4,000명을 헤아릴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처럼 환영하고 공경했다.
    주 신부는 성무를 집행할 수 있도록 조선어를 배우는데 전심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1795년 성주간에 남녀 어른 몇 명에게 세례와 고해성사를 주었다.
    그리고 부활대축일(4월 5일) 처음으로 미사를 드렸다. 이 미사는 조선교회가 창설된 후 처음으로 하느님께 봉헌한 새로운 약속의 제사였다.
    1975년 4월(음), 주 신부는 유항검의 초청으로 전주를 방문하게 되었다. 주 신부를 전라도로 안내한 사람은 이존창과 유관검이었다.
    주 신부는 유항검의 사람됨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가성직제도의 부당성을 맨 먼저 지적했을 뿐 아니라 가성사(假性事)를 중단토록 누누이 역설하며 북경교회에 청죄사(請罪使)를 파견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었고, 조선교회 신도들 중 유수한 학자 출신의 어떤 신도들 보다도 천주교 교리를 깊이 있게 탐구한 인물이었으며, 1793년 신부 영입운동 자금으로
    200냥을 내었던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주 신부는 6, 7일을 머물러 성사를 집전하며 강론을 하고, 유항검과 여러 가지 교리를 진지하게 토론하였다.
    이때 유항검의 아들 유중철(柚重哲) 요한은 첫영성체를 하게 된다.
  • 신교(信敎)의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

  • 주 신부가 입국한 지 반 년 만에 신부를 영업하고 은닉시킨 죄목으로 세 사람이 처형(을묘사건:윤유일, 최인길, 지황 순교)되자,
    조선교회는 박해에서 벗어나고 신교(信敎)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길은 대박(大舶, 큰배)를 청하여 맞는 것이 최상책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이 계획은 주 신부의 요청에 따라 전라도 지방 신도들이 주축이 되어 추진하게 되었다.
    조선교회가 1790년 1차로 선교사를 맞아들일 계획으로 서양의 큰 배를 보내주도록 청했을 때는 오직 선교사 영입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신도들이 알기로는, "서양인이 세상을 두루 돌아다닐 때 반드시 큰 배를 타고 천주교를 포교한다."고 하여 큰 배를 선교사들의 교통수단으로
    인식하고 선교사와 대박을 동일시하였다.
    그러나 1795년 박해 이후로는 대박을 영입하려는 목적은 선교사 영입뿐만 아니라 선교의 자유를 성취하려는 의도로 발전했다.
    주 신부는 대박을 불러들여 본격적으로 활동한다면 포교사업이 성공하리라 여겼고, 신도들은 주 신부의 안전을 보호받을 뿐 아니라 신교의
    자유를 얻어 교세가 신장될 것을 확신했다. 당시 신도들은, “지금 만약 대박을 맞아들이기만 한다면 나라의 금령이 반드시 풀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천주교가 널리 전파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신도들의 그와 같은 생각은 마태오 리치(Matteo Ricci)가 중국에서 처음 포교할 당시를
    연상한데서 나온 것이었다.
  • 대박청원 추진을
    주관하는
    전라도 신도들

  • 1795년 8월, 주문모 신부는 유항검 형제에게 한 통의 서신을 보냈다.
    주 신부는 그 편지에 대박청원의 추진 계획을 알리면서 전라도 지방 신도들의 협조를 요청했다.
    그런데 대박을 맞아들이려는 계획은 주신부 개인적인 희망이 아니라 조선 신도들의 공통된 소망이었다.
    주 신부는 신도들에게 이러한 지시를 했다.
    첫째, 북경 주교에게 대박을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작성 할 것,
    둘째, 작성된 청원서에 지도층 신도들의 연대서명을 받을 것.
    셋째, 북경에 서찰을 가지고 갈 신실한 사람을 천거할 것.
    넷째, 이 일을 추진하는데 소요되는 경비를 담당할 것 들이었다.
    당시 신도들은 자기들이 서사(書辭, 편지의 글)를 꾸미기가 어려워 청원서를 작성하기가 힘들다고 하자, 주신부는 청원서 초안을 만들어
    유관검에게 보냈다. 결국 이 청원서는 주신부와 신도들의 합작으로 작성되었다.
    유관검의 말에 따르면 청원서의 내용에는 조선 정부를 회유하여 천주교를 받아들이도록 해달라는 우호적이고 친선적인 방법이 제시되었다.
    주 신부의 계획은 유항검, 유관검, 유중태(油重泰), 윤진헌(尹持憲, 프란치스코) 등에 의해 구체화 되었다.
    먼저 밀사로 황심(黃心, 토마스)이 천거되었다.
    대박청원서에는 유항검 형제와 이들의 조카인 유중태, 그리고 윤지헌, 최창현 등이 연대서명하였다.
    그러나 국경의 경계가 삼엄하여 미루어 오다가 1796년 겨울에 가서야 파견이 이루어졌다.
    유항검 형제와 유중태는 황심을 파견하는 경비로 400냥을 내놓았다.
    그리하여 황심은 1796년 9월 14일자로 쓴 라틴어 편지와 신도들의 청원서를 북경의 구베아주교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주교는 조선교회의 대박파송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1797년 봄 황심은 주교의 답장을 가지고 귀국했다.
    그러나 주교의 말에 주저앉을 신도들이 아니었다.
  • 끈질긴
    대박청원운동 전개

  • 서양 선박의 파송은 조선 신도들의 소원만 아니라 주교 역시 같은 뜻이었지만, 자기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교회는 계속 대박파송 청원을 끈질기게 추진했다.
    여기에 전라도 교회는 유항검 형제를 중심으로 심혈을 쏟으며 재정적 지원과 밀사 파견에 깊이 관여했다.
    황심은 1979년에도 동지사행에 끼어 다시 북경으로 밀행하여 1798년에 귀국하고, 1799년 다시 북경을 밀행하여 1800년에 귀국하는 등
    모두 4차에 걸쳐 북경을 밀행했다. 그런데 밀사로 활약한 사람으로는 황심 외에 옥천의(玉千儀, 요한)와 김유산(金有山, 토마스) 등이 있다.
    이들을 밀사로 천거하는데 이존창과 윤지헌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밀사들의 후견인은 유항검 등이었다.
    황심은 자기에게 밀사의 대임을 맡긴 유항검에게 매번 밀행 결과를 보고하고, 북경에 전달할 내용을 상의하고,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전주 초남리를 방문했다. 그리고 김유산에게 밀행을 부탁한 사람은 이존창 이었을지언정 이를 후원한 사람은 유항검과 윤지헌이었다.